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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 & ma(color), FRP, 160×136×115cm, 127×107×115cm, 2008

 
실제보다 길게 늘여지거나 납작하게 짓눌려진 신체. 이환권의 신체조각은 허리우드키드로 대변되는 영상세대의 추억과 기억 없이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작가의 작업은 와이드스크린 전용으로 제작된 영화필름을 그 비례가 다른 신종 미디어로 재생할 때 생기는 이미지 왜곡현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렇게 왜곡된 이미지와 함께 이따금씩 비마저 내리는 그 비현실적 비전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그 꿈이 마침내 그의 조각 속에서 실현된다. 그의 왜곡된 신체는 미디어가 재생해낸 이미지를 상기시키며, 일상을 참조한 것이지만 정작 일상보다 더 흥미진진한 시뮬라크라(실제론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받아들여지는 가상현실)를 암시한다. 그 조각을 지지하는 일상과 이상, 현실과 가상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일찍이 작가가 꿈꿔온 영화 속의 세계로부터 건네져 온 것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작가의 눈엔 현실과 일상이 영화 속 세계처럼 비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프랑스의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소사이어티>(구경거리의 사회)라는 저서에서 이런 현상을 예감한 바 있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것이다. 인생은 한 편의 영화와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제목의 영화에 출현한 배우들인지도 모른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가 달라지면 메시지가 달라진다고 했다. 작가가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신체조각은 그 공력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미디어적이다. 그러나 첨단을 구가하는 현대판 미디어와는 그 거리가 멀다. 구닥다리 미디어, 따뜻한 미디어, 향수를 자아내는 미디어에 가깝다. 이렇게 작가의 조각 속엔 아날로그 미디어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시스템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사회학적 인식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미디어가 폐기되고 신종 미디어로 대체되는 것은(왜곡된 신체에 대한 작가의 경험은 바로 그 과정에서 유래한 것) 경제적인 효용성의 법칙 즉 자본주의 시대의 실질적인 권력구조와 관련이 깊다. 하루가 다르게 폐기처분되는 미디어들의 대열 속에서 가장 전통적 미디어인 영화(물론 영화 자체도 진화하지만)에로 끊임없이 자기를 되돌려 놓는 작가의 기획은 그래서 더 소중하고 정겹고 공감을 준다. 

Jang Dock Dae(color), FRP, installation view, 2008

그렇다면 인체는 어떻게 왜 왜곡돼 보이는 것일까. 우리는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일종의 틀 즉 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 관성에 어긋날 때 사물은 왜곡돼 보인다. 재생 미디어의 시스템이 달라질 때 이미지의 비례가 왜곡돼 보이는 것도 이런 관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이미 길들여진 시공간 조건에 변화를 줌으로써 사물을 인식하는 틀을 재고하게끔 유도할 수도 있다. 이는 물리학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를 현실인식의 자장 속에서 경험하기란 쉽지가 않다. 오히려 시지각 현상과 관련된 미술사의 자장 속에서 그 실증적이면서도 풍부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 이를테면 길게 늘여진 신체를 통해 엑스터시(접신 행위를 통한 황홀경)를 표현한 엘 그레코, 전면 가득한 발에 비해 현저하게 단축돼 보이는 누워있는 그리스도의 신체를 그린 만테냐(단축법), 볼록거울과 오목거울에 반영된 왜곡된 자화상을 그린 파르미 지아니노(한스 홀바인의 해골 그림 역시 이러한 만곡법을 적용해 그린 것이다) 등등.

하지만 이 사례들은 모두 평면적인 이미지의 자장 속에서의 일이다. 만약 그 왜곡상을 3차원의 입체공간에 구현한다면 어떻게 될까. 바로 이환권의 신체조각을 대면했을 때 맞닥트리는 낯설음과 당혹스러움은 여기서 비롯된다. 관성이 평면으로 구현된 왜곡상에는 어느 정도 길들여져 있지만, 입체로 실현된 왜곡상에 대해서만큼은 아직 생경하기 때문이다(결국 중요한 것은 길들여짐의 문제가 아닐까). 

더욱이 그 왜곡상은 내가 속해져 있는 현실의(혹은 현실인식의) 자장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와 나와 실재감을 겨루고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그 조각은 나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자장에 속해져 있다는 점에서 실재감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그 왜곡된 상이 나의 관성에 어긋난다는 점에선 허구적이다. 이렇듯 작가의 조각은 현실인식과 허구의 자장과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현실과 허구 사이에 펼쳐진 시지각적 지평의 한 지점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실과 허구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관성을 무색하게 하고 재고하게 한다(현실과 허구는 한 몸이다).

이렇듯 작가의 왜곡된 신체조각은 미디어와 시스템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인식, 물리적 현상에 대한 인식, 시지각 현상에 연동된 심리적 현상에 대한 인식(그 자체 게슈탈트 이론과도 무관하지 않은), 그리고 실제와 허구의 관계에 대한 인식 등 여러 이질적인 계기들을 아우르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물이 왜곡돼 보이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넘어 심리적 현상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작가는 앞질러 가는 정신과 여전히 현실에 묶여 있는 관성과의 차이와 거리와 갭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자체 뒤르켐의 정신지체현상(앞서가는 물질문명에 비해 뒤쳐진 정신문명으로 나타난)을 뒤집어놓은 것 같다. 몸은 여전히 현실에 붙잡혀 있는데 정작 정신이 저 홀로 몸의 관성을 앞질러 간다면, 몸이 미처 보지 못한 미래를 정신이 앞당겨 본다면 분명 현실인식에 꽤나 심각한 파열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바로 그 파열과 균열을 형상화한 것이다.

Pa & ma(color), FRP, 160×136×115cm, 127×107×115cm, 2008

Son & Daughter (color), FRP, 113x76x76cm, 102X80X70cm, 2008

이처럼 이환권의 조각 속엔 신체와 사물을 왜곡시키는 물리적 계기와 더불어 특히 심리적 계기가 투사돼 있다. 몸(관성)을 추월하는 정신(정신추월현상)과 여타의 심리적 계기가 상상력과 공모해서 사물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특히 <바람 부는 날>과 <책이 되다> 같은 작품이 주목되는데, <바람 부는 날>에서 작가는 일종의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상황을 도입하고 있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휘어지는 사물의 형태가 다만 사실적인 형태를 길게 늘이거나 압축시켜 놓은 그 동안의 작업들과는 사뭇 다른 지점을, 한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추후의 작업에서는 이처럼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상황의 도입 내지는 강화로 인해 현실(혹은 현실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키려는 시도가 더 적극적으로 도입될 것 같다.

그리고 <책이 되다>란 작품은 책에 몰입한 나머지 마침내 스스로 책이 돼버린 독자의 정황을 재현한 것이다. 독자의 몸 전체가, 특히 벌려진 두 다리가 펼쳐진 책처럼 얇아져 마침내 책이 돼버린, 책에 동화되고 육화되어져가는 과정을 포착한 것이다. 이 작업은 질 들뢰즈의 <되기 철학>을 상기시킨다. 주지하다시피 들뢰즈의 <되기 철학>은 모든 종류의 관성을 고착화하려는 제도의 기획에 반(反)하는 것으로서, 유목전사의 욕망을 실현하는 무기로써의 상상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추후 작가의 작업이 이를 본격적으로 지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이외에도 일종의 그림자를 형상화한 작품 <같은 곳에 있지만> 역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두 사람의 그림자를 서로 어긋나게 배치한 것인데, 이를테면 남자의 그림자가 그대로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는 반면, 여자의 그림자는 바닥에서 한번 꺾여져 그 상반신이 벽 위에 드리워진 것으로 표현돼 있다. 이로써 실제로는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이지만, 정작 그림자는 서로 다른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 양 어긋나게 표현됨으로써 일종의 극적 반전이 연출돼 보인다. 말할 수 없는 것, 말하지 못한 것을 그림자를 통해 말하게 함으로써 암시력(그 자체 일종의 의미론적 여백으로 작용하는)이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품들에 도입된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상황 자체는 현실인식에서 벗어난 허무맹랑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인식을 확장하고 있는 양 보인다. 그러니까 현실인식(현실을 현실로서 인식할 수 있는 자장)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철저히 허구적인 상황의 재현과는 처음부터 그 맥락이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에 의해 재현되고 제시된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상황이 실제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할 법한 일인 것이다. 이를테면 바람이 강하면 사물은 휘어지기 마련이고, 책에 몰입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책에 동화된 나머지 독자와 책의 경계가 (적어도 의식 속에서만큼은) 지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Jang Dock Dae(color), FRP, installation view, 2008

Jang Dock Dae(mono), FRP, installation view, 2008

그리고 서로 마주하고 있는 연인일지라도 정작 마음속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여기에 없다거나,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자크 라캉의 전언도 알고 보면 이런 소외현상(의식과 무의식, 주체와 타자와의 소외현상)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상황을 끌어들이면서도 설득력을 잃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일상적이고 심리적인 상황, 한번쯤 생각할 법한 상황, 그리고 상식적인 상황의 자장 속에서 상상력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환권은 근작인 <장독대>에서 삼대가 모여 사는 가족을 장독대에다 비유한다. 마치 항아리처럼 짓눌려진 형태로 표현된 이 군집초상작업은 주로 신체를 길게 늘려놓은 이전의 작품들과 구별된다. 이전의 길게 늘여진 신체가 하나같이 단독초상 형태로 제시됨으로써 개별주체의 고립감과 소외감을 극대화하고 있다면(그 자체 현대인의 보편조건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는), 이 군집 작품은 가족 간의 유대감과 함께 따뜻하고 우호적인 느낌을 준다. 아마도 길게 늘여진 형태가 모던한 느낌과 함께 소외감을 불러일으키고(이를테면 자코메티의 초상조각에서와 같은), 펑퍼짐한 형태가 인간적인 느낌과 함께 친근함을 자아내는 식의 일종의 형태지각심리학의 관점에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어떤 식으로든 정서적인 환기력이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는데, 그 정서의 축이 마치 고립된 섬처럼 저마다 자기 내면을 투시하고 있던 것에서,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보다 진척된(?) 인식으로 옮아온 듯하다.

Reon & Matilda,760x740x1590, 합성수지 목재, 2009

Reon & Matilda,760x740x1590, 합성수지 목재, 2009

이와 함께 작가는 근작에서 마침내 영화 속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는 꿈을 실현한다. 뤽 벡송 감독 영화 <레옹>(Leon)의 한 장면으로서, 고아소녀 마틸다(나탈리 포트만)가 킬러 레옹(장 르노)에게서 권총을 조립하고 장착하는 방법을 학습하고 있는 장면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 영화는 소위 롤리타 신드롬의 현대판 버전으로도 유명한데, 사회에 노출되기 직전의 여전히 풋풋함을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소녀와, 그 순수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져 사회와 맞서는 정의로운 사도와의 관계를 통해 허리우드 판 느와르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비록 영화 자체는 프랑스 영화지만). 어쩌면 영화에서의 서사는 현실과 거꾸로 일지도 모른다. 순수는 지켜져야 하고, 정의는 승리해야 한다. 현실이 그렇지 못할 때 영화 속 정의는 강조되기 마련이고, 현실이 꿈을 짓밟을 때 영화 속 판타지는 강화되기 마련이다. 영화는 꿈의 산업이다. 때로는 그 꿈이 현실인식을 흐리게 한다지만 꿈꾸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세상을 건너갈 것인가. 미학이 아니라면 삶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니체의 말을 이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글_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Posted by EYEBALL_Media Arts Web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