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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보름달과 올빼미 떼와 우리처럼, 미친 존재들만이 부산스럽다.

과거 인류의 밤은 찰스 올슨(Charles Olson 1910~1970)이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인간이 아닌 자연의 밤이었습니다. 어두워서 두렵기도 한 자연의 밤에 불을 밝힌 것은 전구라는 이름의 문명입니다. 24시간 내내 잠들지 않는 낮보다 환한 도시의 밤이 시작된 것이지요. 상점의 네온사인이 현란한 불빛으로 쉴 새 없이 호객행위를 합니다.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가 밤늦도록 속도를 늦출 줄 모릅니다. 도시에 촘촘한 가로등과 보안등의 수가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납니다. 고층 빌딩에 꺼지지 않는 형광등들이 문제없는 삶의 증표처럼 여겨집니다.

인공의 빛 덕분에 도시는 덤으로 밤의 경치를 얻었습니다. 관광 엽서에 담겨 이 도시 저 도시를 유령처럼 떠다니는 황홀한 야경에는 백만 불이라는 가격표가 붙었습니다. 검은 벨벳 천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흩어 놓은 것 같은 명품 조망권이 도시인들의 욕망 리스트에 추가됩니다. 기막힌 야경을 보기 위해 끝없이 올라야 합니다. 남다른 조망권을 차지하기 위해 상식을 넘어선 비용도 치러야 하지요. 별빛을 끄고 불빛을 켠 문명이 결합된 도시의 밤 풍경에서 우리는 높고 뚱뚱해져만 가는 욕망뿐 아니라 ‘우리’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합니다. 도시는 어떤 이들에게는 눈요깃거리의 관광지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투자의 대상이지만 이곳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터이고 일터이기 때문입니다.

도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박상희(1969~ ) 그림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작가는 인천에서 나고 자라, 살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아픈 우리 근대사에서 개항장의 역할을 했던 이곳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또한 미래도시를 지향하는 이곳은 개발을 둘러싸고 오늘과 내일이 충돌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인천뿐 아니라 대부분의 도시가 그렇습니다. 고단한 현재는 잊히거나 복권된 과거와 함께 존재합니다. 분주한 오늘은 계획되거나 유보된 내일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폐허가 된 공간에 오래 머물러 봅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앞서간 누군가의 체취를 떠올립니다. 그들의 과거가 나의 현재를 돌아다보게 합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층 빌딩 공사가 한창인 신도시 개발 현장 한 가운데 서있습니다. 무작정 질러 들어가 길을 잃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 한 날처럼 두려움이 앞섭니다. 명확한 이정표 없이는 어떤 현란함에도 흔들리지 않겠노라 어린 시절의 맹세를 떠올립니다. 고색창연한 벽돌 건물 앞에 멈추어 섭니다. 오래된 새로움에 이끌립니다. 어제의 흔적이 내일까지 충분히 쓰고 남을 오늘의 에너지가 됩니다.

‘여러 시대의 시간 층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공간’이라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이 정의한 도시를 작가의 그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캔버스 위에 도시 상점의 간판을 만들 때 사용하는 접착 시트지를 여러 번 붙이고 칼로 오려 내고 아크릴로 그리는 공정을 거쳐 하나의 공간에 겹쳐진 시간 층을 만들어 냅니다. 동일한 캔버스가 과거를 품고, 현재를 드러내고, 미래를 예견합니다. 그림 속 오늘은 과거와 미래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리매김이 가능합니다. 스스로 ‘보물 창고’라 이름붙인 도시에 층을 만들고 인상을 부여하지만 작가는 반짝이는 네온사인 물결에 넋을 잃고 쳐다보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해관계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길을 가는 행인도 아닙니다. 또 다른 도시 체험자입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북적거리는 거리를 느린 걸음으로 거니는 것에서 특별한 즐거움을 찾는 도시의 산책자입니다. 도시에서 얻은 생의 긍정과 존재에 대한 확신이 횡재가 될 수 있는 것도, 그곳에서 끝내지 못한 숨바꼭질이나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이 헛걸음이 아닐 수 있는 것도 마음을 비우고 특별한 목적 없이 즐겁게 헤맬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읽었던 일본 소설 속 ‘보행제(步行祭)’를 떠올립니다. 말 그대로 보행제는 걷기 행사입니다. 소설 속에서 사건다운 사건이라고는 남녀공학에서 해마다 벌어지는 보행제를 맞아 고등학생들이 오로지 걷는 것뿐입니다. 아침 여덟 시에 걸어서 학교를 출발해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걸어 들어오는 소설의 밋밋함이 감동으로 바뀌는 지점은 밤이 오면서입니다. 낮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어둠 속에서 오갑니다. 출발점과 목적지가 같은 80 킬로미터 걷기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영문도 모르고 줄을 지어 걷다 낯선 나를 만나고 진실하게 남과 소통합니다.

보행제의 목적이 단순한 걷기가 아니듯 박상희 그림의 목표도 도시 풍경을 캔버스에 담는 것에 온전히 있지 않습니다. 공간에서 시간으로, 시간에서 존재로 차원을 달리하며 회복되는 것은 역사적 지역적 개성을 덜어내고 대동소이하게 평준화된 도시성만이 아닙니다. 주체이기도 합니다.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1969~ )은 『여행의 기술』에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하지만 도시 한 가운데서 헛헛함이나 수심이 발목을 잡아도 좀처럼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잠시 떠났다가도 결국 다시 도시로 돌아와 머물며 살 수 밖에 없는 도시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삶의 기술’이 아닐까요. 반복되는 삶 자체를 날마다의 산보로 만드는.

공주형 미술평론가

* 이 글은 인천아트플랫폼 이얍전에 게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Posted by EYEBALL_Media Arts Web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