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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고전적 비극에 대한 하나의 다분히 '다원적'인 해석을 위해 홍성민이 행한
역할은 '연출'이 아니라, '기획'이다. 홍성민은 이 작품을 위해 다섯 명의 연출가(남주경, 김
진경, 김수희, 원춘규, 박혜선)에게 각각 한 명씩의 연기자(김혜지, 이주영, 추은경, 김요아,
이지현)를 할당, <로미오와 줄리엣>의 유명한 여주인공역의 연기 연출을 의뢰했다.
의 무대는 담당 연출가의 연출을 받은 다섯 명의 여배우들이 연기하는 줄리엣의
대사와 동작으로 이루어진다. 모두 한꺼번에 등장이다!!!!! 



무대 위에는 로미오는 물론, 다른 등장인물들도 전무하고, 의자 외에는 극적 상황의 전달
을 돕는 그 어떤 미장센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섯 명의 줄리엣만이 각자의 연기에 몰입할
뿐이다. '일인다역'이 아닌, '다인일역'으로 나뉜 배우들은 마치 남대문 시장에서 옆집과 경
쟁을 벌이며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처럼 각자의 개성에 대한 관객의 집중을 호소한다. 순수
하고 지고한 사랑의 화신은 시끄러운 에고이스트들로 분열된다. 사랑의 근원은 결국 구릴
정도로 치열한 자기애인 것일까? 셰익스피어의 섬세한 사랑의 언어는 각기 다른 배우들의
육성을 통해 무질서하게 충돌하고 중첩되면서 그저 하찮은 노이즈로 전락하고 만다. 그나마
여러 목소리가 합창처럼 일치하거나 돌림노래처럼 시간차를 두고 울리는 찰나의 우연(혹은
기적)이 해체된 사랑의 담론을 왜소하게나마 가까스로 공명시킬 뿐이다. 물론 짤막한 메아
리조차 없는 투박하고 건조한 공명이다.

다섯 명의 깨지기 쉬운 캐릭터들 간에 서로의 존재감에 대한 인식이나 반응은 없다. 그들
은 그저 각자의 세계에 빠져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하나의 장소에 '공존'하지만 '공생'하지
는 않는 것이다. 무대는 (영화에서의 중복화면처럼) 여러 독립된 다이에제시스의 중첩이기
도 하며,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업과 같은) 원형 없는 표상의 증식이기도 하다. (영화 <아일
랜드>에서의) 복제인간이 그러하듯, 다섯 개의 표상들은 서로의 개성을 부각시키는 매개가
되는 동시에, 서로의 고유성을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경쟁자이자 분신! 서로에 대한 대체 자아이자 절대적 타자!

전통적인 재현 연극의 기반이 되는 연기자와 인물 간의 봉합은 물론 느슨한 상태에 방치
된다. 반복이 변증법적 진보로 이어질 리 역시 만무하다. 비인격화된 표상들은 언어의 주체
가 아닌 매개가 되고 만다. 라캉의 유명한 명제대로, 발화의 주인공은 인간 주체가 아니라
언어인 것이다.


발화 작용을 이루는 두 축, 그러니까 선택을 위한 계열체(paradigm)와 수평적인 나열을
이루는 통합체(symtagma) 중에서 계열체만이 반복될 때, 아니 계열체가 통합체의 구조를
흉내 내어 수직적인 표상의 체계를 수평적으로 확장할 때, 기표는 언캐니해진다. 정서적 동
기와 의미를 확보하려는 배우들의 연극적 동작(action)은 사소하고 무의미한 몸짓(gesture)
으로 전락한다. 연출가의 고민과 정제로 다듬어지는 ‘동작’이 아닌, 무의미와 부조리의 익살
스런 허무함을 횡단하는 그런 ‘몸짓’ 말이다. 롤랑 바르트가 선언한 ‘저자의 죽음’은 다섯 명
의 연출가에게도, ‘기획자’인 홍성민에게도, 심지어는 원작자인 셰익스피어에게도 하나의 위
협처럼 던져진다. 희곡을 기반으로 삼는 전통 연극의 언어적 기반은 왜소해진다.



막간을 채우는 귀에 익은 할리우드의 OST는 올리비아 헛세의 아우라를 공적인 기억으로
부터 소환하지만, 도리어 생경해진 무대를 더욱 외설스럽게 만들 뿐이다. 허망한 표상들의
군무만이 난무하는 무대에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독보적인 실체 따위가 정착할 자리는 당연
히 없는 것이다. 소환되는 공적 기억이 자리 잡지 못하는 텅빔은 물론 연극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환원되는 장소다. 허구적 표상과 공적 기억, 그리고 예술적 체험에 대한 의문들이
도사리게 되는 그런 공터.

서현석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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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YEBALL_Media Arts Web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