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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_situation(people)_캔버스에 유채_120×240cm_2009

 

[전시일정: 갤러리 현대 2009 10.30~11.18]
하나가 될 수 없는 하나들 노래 가사로부터 인용한 전시부제 'ride the train'은 같은 기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처럼 비슷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했다. 이정아는 어느 한쪽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군중들의 발걸음들을 그린 한 작품은 무리의 패턴을 보여준다. 그것은 현대인의 생산과 노동 주기에 새겨진 동질적 질서를 표현하는 듯하다. 그들은 모두 다른 옷과 신발을 신었지만,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중성적인 관찰자적인 입장으로 어떤 상황 속의 인간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데 집중해왔던 이정아는 이번 전시에서 왕래하는 길목에 있는 강남 신세계 백화점을 무대로 삼았다. 모든 것을 한 곳에서 해결하기를 촉구하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생산에서 소비로 강조점이 이동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축소판이다. 소비와 여흥을 위해 몰려든 인간들은 현대에 살고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들로 그들의 행색이나 행동거지는 일련의 패턴들로 수집된다.

이정아_situation(talk)_캔버스에 유채_120×240cm_2009

작품 [situation-female]은 위에서 관찰한 여성 쇼핑객 세 명을 그린 것으로, 마치 박스에 안치된 수집품처럼 화면 가운데 배치되어 있다. 굳이 상표가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그들은 알만한 브랜드 가방을 들거나 메고 있다. 비슷한 몸매와 옷차림새는 그들이 담고 있는 시공간의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그들의 외형은 같은 성, 비슷한 연령대, 계층, 취향 등의 산물이다. 백화점 한켠에서 쉬고 있는 남자들을 그린 작품 [situation-talk]는 소비 행위 이면의 진실, 요컨대 기꺼이 참여한 여가 활동에 내재된 소외의 분위기를 좀 더 직접적으로 전달해 준다. 같은 스타일의 모자와 옷, 자세를 취한 할아버지 세 명은 단지 다른 무늬일 뿐 거의 쌍둥이 같다. 2/3이상이 공백처럼 비어있는 배경은 물건들과 기표들로 휘황찬란했을 장소를 비워낸다.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공백은 현실의 구체적인 맥락을 지움으로서 거의 피사체에 가까운 대상에 주목하게 한다. 구경꾼들은 소비자의 대열에서 다소간 물러나 있지만, 여전히 잠재적인 소비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여가의 공간에서 조차 매우 불편한 자세로 책을 읽는 백화점 속의 남자는 결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는 삶의 질서에 억류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생산에서의 소외는 소비에서의 소외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정아의 그림에 나타난 백화점 속의 다양한 부류들은 부산한 소비자이든 한산한 관망자이든 이들은 모두 공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간이 뱉어낸 것 같다. 현대사회의 가장 전형적인 장소에서의 인간, 곧 대표적인 물신적 구조와 소비자들을 포착한 이정아의 그림에서 억압이나 소외를 읽을 수는 있지만, 그림 자체 내에서는 그것들이 내포할지도 모르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는 휘발되어 있다. 이 그림들에서 시대의 단편들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회학적 보고서 같은 것은 아니다. 그녀의 그림은 철저히 중성적이거나 양면적이다. 가령, 그러한 삶속에 덫이 있다면 그것은 투명한 것이고, 사람들이 피동적으로 걸려들기 보다는 끝도 없는 욕망을 품은 채 기꺼이 얽혀들기를 바라는 자발성 같은 것이 있다. 사람들 자체보다는 상황 속의 신체언어와 그 관계에 집중하는 이정아의 그림은 극적 요소가 있다. 극적이라 함은 드라마틱한 장면이나 어떤 이야기의 전달에 역점을 둔다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 배경이 생략된 이 그림들은 캔버스를 실험극이나 상황극의 무대라는 맥락에 놓여진다. 작가는 '캔버스는 무대이고, 사람들을 내가 짜놓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물로 불러 들인다'고 말한다. 똑같은 상황에서 여러 행동을 보여주는 것,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른 포즈, 대중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몸짓들을 포착하려 한다. 그것은 하나의 행동이지만 삶이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2008년에 쓴 작가 노트에는 살아가는 시간들 중의 한 순간과 상황을 채집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밝힌다. 이정아의 채집의 방식에는 특정상황을 참가자에게 제시하고 그 결과물을 취하는 실험실적인 방식과, 현실 속에서 관찰된 것을 재가공하는 방식이 있다. 상황을 설정하는 것과 찾아내는 방식의 차이인데, 양자는 다소간 호환적이다.

이정아_situation(female)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09

독일에서의 작업은 주로 실험적이었다면, 이번 전시는 현실적이다. 그러나 실험실적인 설정 작업에서도 참여자들을 완전히 제어되지는 않으며, 현실 공간에서 사람들의 행동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이론적 실험과 경험적 관찰은 완전히 구별되기 보다는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스튜디오에서 설정된 상황들, 가령 마주 웅크려 있거나 좁은 장소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사람들, 일정한 크기의 원 안이나 구위에 앉은 사람들을 그린 작품에서 인간들끼리, 또는 인간과 사물끼리 마주할 때의 예기치 못한 단면이 드러나곤 하며, 거대 쇼핑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도 틀에 박힌 행동거지들이 포착되는 것이다. 실험실적이든 경험적인 상황이든, 등장인물들은 모두 익명적이며, 전체가 아닌 부분이다. 이면으로 정면을, 부분으로 전체를 포착하는 전략이다. 삭제된 배경은 대상의 익명성과 그것을 재현하는 주체의 중성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그것은 그리기 전에 개입되는 사진 작업과 컴퓨터 상의 보정을 통해 강화된다. 복잡다단한 조형적 요소와 회화적 무게를 단출하게 만들고, 작가를 찔러왔던 어떤 순간을 집약적으로 제시한다. 이정아는 참고 대상이나 회화적 재현의 과정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회화로 완성되는 최종적인 결과물에는 기계 복제 매체와는 다른 회화 특유의 공간감과 촉촉한 느낌을 보유한다. 그것은 사물이나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여 그것의 내면을 드러내거나, 반대로 주체의 대구를 이루는 객체로 대상화하는 태도는 아니다. 스스로를 자신과 대상의 바깥에 놓음으로서, 현실의 또 다른 차원을 제시하려 하는 것이다. 바깥에 놓는다는 것은 슬쩍 비껴있다는 것이지, 주체와 객체를 가정하거나 그것을 초월하는 태도가 아니다. 바깥이라는 위치는 감정이입, 표현, 비판, 대상화 같은 방식과 차이를 두게 한다. 자신과 대상의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는 입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이정아가 소재로 삼는 사람들의 특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정아_situation(walk#3)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2009

대량생산 및 소비와 더불어 등장한 대중은 체계에 의해 이합 집산되는 존재로, 일찍이 사회심리학자들에 의해 그 무의식적인 측면이 강조되어왔다. 귀스타브 르봉의 [군중의 심리학]은 프로이트가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던 19세기 말에 출간된 책으로, 그는 여기에서 개인들의 의식적인 행동이 군중의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대체된다고 말했다.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집단의 차원이 될 때 군중은 무의식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정아가 소재로 삼은 백화점 속의 군상들은 각자 따로 다니지만, 소비자로서의 집단적 정체성을 가진다. 작품 속 인간들이 소지하는 상품들의 일관성이 그것을 예증한다. 생산적인 차원에서 양적인 균질화가 달성된 이후의 소비는 욕망과 무의식이 상품 선택의 관건이 된다. 익명적 인물들은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인간이나, 민족 내지 계급적 주체와는 거리가 있는 개인들이다. 그들은 근대적 주체의 자율성의 신화가 깨지고 주체성의 해체가 빈번하게 말해지는 현대사회의 구성인자들로, '주체 없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부르디외)를 만들어가고 있다. 근대가 이룩한 보편적 주체가 구조적 질서에 예속되어 가면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하는 매개물이 된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한 거대 쇼핑 공간은 현대소비사회를 추동하는 힘이 개인의 사소한 행동거지에 관통되는 장이다. 쇼핑객들은 홀로 움직이지만 비슷한 여정을 통과하며, 끝없이 새로운 것을 갈구하지만 비슷한 것을 소비한다. 대량적인 소비를 야기하기 위한 구조의 전략은 동일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동일성 속에서 차이의 움직임과 그 흔적을 찾고자 하는 것이 이정아의 작업이다. 고독한 군중으로서의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면서도, 타자와 접촉하기 위해 경계를 허문다. 쇼핑 공간은 전형적인 스펙타클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정아의 작품에서 스펙타클은 생략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그것은 상황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무대 막이 된다. 동시에 그것은 일상의 공간이다. 작가는 스펙타클적 상품소비의 사회에 주목했던 상황주의자들Situationisis처럼, 소비 대중의 행동패턴이 형성되는 흐름과 만남, 사건 등을 통해, 개인의 의식은 물론이고 무의식까지 침투해 있고 작동하는 미시적 권력을 가시화하기 위해 상황을 설정하고 재배치한다.

이정아_situation(female#1)_캔버스에 유채_100×200cm_2009

익명의 대중들은 자유로운 소비와 여흥의 시간에서 조차 경험과 소통의 직접성이 아니라, 중층적으로 매개된 질서가 내재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직접성이 아니라, 매개의 중층성으로부터 사람들 고유의 행색과 행동거지가 나타난다. 소비는 사람들을 각자의 개성으로 빛나게 할 것을 약속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보면 엇비슷하다. 이정아의 그림에는 겉보기의 다채로움 속에 관통되어 있는 동질성을 포착할 수 있는 어떤 간격이 있다. 물론 이러한 동질성은 미세한 차이들로 채워져 있다. 동질성과 이질성은 서로의 짝패를 이룬다. 작품 속의 사람들은 어떤 가치나 융합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다. 주체의 동일성도 고유성도 사라져 있다. 그들은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바타유), 부정의 공동체에 가깝다. 여기에서 나와 타자의 함께 있음은 개인도 전체의 영역으로의 환원이 아닌, 관계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단지 다수일 뿐이다. 장 뤽 낭시는 [마주한 공동체]에서 다수라는 말은 세계 인민의 다수성 뿐만 아니라, 상위의 단일체제를 벗어나 차이들을 확산시키며 소규모의 그룹들, 개인들, 무리들, 주민들 내로 흩어져 퍼져 나가는 다양성을 환기시킨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다수는 대중 혹은 군중이라 여겨졌던 것을 교정하고 변형시킨다. 다수의 다양성이 형태화(구조화) 되기를 기다리는 대중이 아니라, 흩어짐 가운데 그자체로 가치를 갖는다. 이정아의 그림 속 인물들이 단지 대중이나 군중으로 집단화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결코 하나(전체)가 될 수 없는 하나(개체)들이기 때문이다. 이정아의 그림에 나타나는 인간들은 '복수적 단수의 존재'(낭시)로서 그들의 실존은 긍정적인 의미이든 아니든 타인과 함께 한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이루는 일련의 관계망과 익명성은 도처에서 만날 수 있고 나의 내부에서도 만날 수 있는 이들이다.

특히 사진적 시점이 보존된 작품 속 인간들의 자세는 지속보다 순간성에 호소한다. 이러한 순간성은 인간을 지속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만들려는 구조들을 벗어나려 한다.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민중이 이러한 특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민중은 현전과 부재, 아니면 현전과 부재의 섞임이다. 거기에는 정적이고 움직이지 않은 어떤 현전, 장소 없는(유토피아) 전체 공간을 잠시 점유하는 현전이 있다. 여기에서 인간들은 더 이상 동일자와 동일자의 상호적 관계가 아니게 되고, 어디에도 귀속시킬 수 없는 자로 나타난다. 익명적 만남은 사회 체계에 의해 결정되는 위치에 따라 호명될 뿐인 자유주의적 주체, 즉 동일자의 질서 바깥을 향한다. 블랑쇼와 달리, 낭시는 '공동체'보다는 '함께 있음'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공동체라는 말은 충일한 것, 나아가 실제와 내면성으로 부풀려진 것으로 들려온다는 것이다. '함께' 라는 것은, 가까움과 내밀성이라는 의미 안에 간격두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함께'는 건조하고 중성적인 표현이다. 연합도 원자화도 아닌, 다만 장소의 나눔, 같이 있음이다.

이정아_situation_캔버스에 유채_ 50x50 cm_2009



글_이선영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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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정아 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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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YEBALL_Media Arts Web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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