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김기영의 1960년작 <하녀>를 보면서 의문스러웠던 것은 모든 비평 지면에서 ‘중산층’이라 묘사하는 그들의 집이 정말 중산층의 집인가, 라는 점이었다. 방직공장에서 음악선생으로 일하는 주인공 동식의 직업이나 손바느질로 가정경제를 보조해야 하는 아내가 처한 현실은 신흥 중산층의 상황이 분명하지만, 때는 산업화가 시작되던 초입인 1960년 아닌가? 1960년이라는 시간은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결실이 맺어져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는 70년대, 즉 어지간한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어렵지않게 ‘식모’라 불리던 하층계급 여성을 볼수 있던 70년대와는 다르다. 60년에 피아노가 있는 이층집 정도의 재산을 축적한 계급이라면 그들은 중산층보다는 오히려 상류층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관객의 소비욕구를 자극하는 멜로드라마의 과장된 미장센 컨벤션을 고려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의아함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10년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에서 느꼈던 이러한 의문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준다. 임상수의 <하녀>는 아예 대한민국 1% 상류층의 저택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원작에 존재하던 내러티브와 미장센 사이의 틈새, 혹은 불일치를 봉합한다. 감독은 60년에 그 정도의 중산층이었다면 2천년대에는 최상위 계급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지배계급의 모습을 자신의 영화 속에 새겨 넣는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이 시대대한민국 최상층, 재벌가의 삶에 한층 더 가까워질 기회를 얻는다.

너무도 유명한 원작을 리메이크하고자 했을 때 감독에게는 관객에게 이 시대 상류계급의 삶이 어떤지 보여주겠다는 야심이 있었을 것이다. 관객 역시, 임상수라면 부자의 삶을 어떻게 보여줄까,라는 관음증적인 욕망으로 감독의 의도에 화답할 준비를 했을테고. 분명히 영화는 그러한 욕망을 어느정도 충족시켜 준다. 아침시간대 주부 대상의 막장 드라마들이 쏟아내는 키치적인 미장센이 아닌, 상당한 물량을 투입해서 ‘사실적으로’ 재현해낸 부자들의 공간. 과도한 광택으로 번쩍거리는 모조품이 아닌 순도 100% 진품으로 연출된 화려한 미장센이 조명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것은 관객의 눈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임상수의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임상수가 김기영의 영화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지점은 바로 영화의 기저에 흐르는 지배적 정서다.


김기영의 <하녀>는 애써 쌓아올린 풍요로움을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중산층 가족의 불안을 폐소공포를 일으키는 이층집 안에서 거의 질식할만큼 강렬하게 묘사했다. 올라감과 추락을 반복하는 계단을 중심으로 타이트하게 잡힌 앵글과 화면사이즈. 그리고 창 밖에서 집안을 들여다보는 이름없는 하녀와 공포에 질린 가족이 하녀에게 되돌려보내는 시선의 교환은 관객에게 이 팽팽한 계급 적대의 서스펜스를 전율을 느끼며 체험하게 한다. 그것은 적대적인 계급의 역관계가 언제든지 전복될수 있는 불안정한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2천년대 임상수의 <하녀>에는 적대적 계급 대립이 야기하는 공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 공간을 지배하는 가부장 훈의 권력은 너무나 강력해서 도무지 붕괴나 균열의 틈이 없다. 여기에는 오직 훈(신자본주의 시대의 승리자)의 지배에 복종하는 하녀들의 알력과 분투만이 있을 뿐이다 (안주인 ‘해라’ 역시 변형된 하녀에 불과하다). 그의 영화에는 더 이상 적대적인 계급 사이의 시선이 교환되지 않는다. 시선의 권력은 일방적으로 훈에게서 나온다. 훈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의 권력은 그가 소유한 두 여성을 향한 짧은 명령어 “빨아.”에 응축되어 있다. 그의 말이 떨어지면 그의 하녀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성심성의껏 그의 성기를 빨아댄다.


김기영의 <하녀>는 영화 전편을 지배하던 불길한 공포감을 제압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조크라며 관객에게 윙크를 날리는 동식의 돌발적인 행동을 필요로 했다. 이 느닷없는 결말이 수습불가능한 계급적 불안을 개인의 상상으로 봉합하려는 영화의 불가능한 노력이라 받아들인다면, 훈의 집을 불태우고 더 이상 이 짓 안한다며 하녀복을 벗어버리는 임상수 하녀들의 마지막 모습은 반대로 계급 변동의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버린 이천년대 한국사회에서 유일한 전복의 수단이 판타지 뿐이라는 사실을 징후적으로 고백한다. 김기영의 <하녀> 만큼이나 임상수 <하녀>의 결말도 느닷없지만 그 의도와 효과는 정반대다. 임상수는 신자유주의 시대 항구화된 자본의 지배 구조 속에서 전복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60년 <하녀>를 지배하던 공포와 불안이 그의 영화에서 냉소로 바뀐 것은 어쩌면 이 시대상에 대한 감독의 정확한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 차가운 냉소 때문에 그의 <하녀>는 더욱 씁쓸한 입맛을 남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EYEBALL_Media Arts Web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