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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상현_조각적인 습격_단채널 비디오_00:06:04_2007 >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중 한명인 김기덕. 한국영화계의 작가주의감독으로 알려진 김기덕은 그야말로 한국 영화계의 주류와는 별개의 감독으로 취급되온 세계적인 감독이다. 2004년 세계 3대 영화제중 하나인 베니스영화제에서 <빈집>으로 은사자상을 수상하고 칸영화제에 초대받았어도 여전히 그에 대한 국내의 시선은 냉담했다. 사람들은 그의 여성편력을 문제시했고(나는 소문으로만 들어 그 실제를 알 수는 없으나) 문학의 영향하에 크게 벗어나지않는 한국영화의 내러티브 과잉은 내러티브보다는 이미지의 재현에 무게를 둔 그의 작품을 우호적인 시선으로 평가하지 못했다. 어쩌면 영화비평계의 다양한 심미안을 활용한 비평적 호흡의 짧음에 그 원인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논의는 그러나, 평론가를 꿈꾸는 지원자들에게 언제나 제 1의 매력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아이러니 한 일이다.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었기에 매혹적인 이미지의 향연을 떨쳐버릴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유명하지만, 그의 작품은 몇 달, 아니 한달안에도 완성되는 그런 영화였고 흔히 말하는 저예산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여성에 대한 가혹한 이미지의 재현 이를 가리켜 페미니즘비평가들은 혹평을 퍼부어대기도 했다. 그러나 미술적 재능에 더불어 독학한 영화연출력과 시나리오능력은 빼어난 이미지들의 향연으로 이어졌고, 이는 김기덕의 중요한 연출능력이자 무기로 자리잡는다. 그런 그의 작품은 단연코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다. 특히 유럽에서 인기를 받는 그의 영화는 영화라는 무빙이미지의 다양성을 체험해온 심미안이 남다른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베니스영화제수상식에서 그는 손바닥에 눈동자를 그린 모습을 들어보이는 센스를 보이기도 했다.

요컨대, 내가 김기덕을 언급하는 것은 영상설치작가 정상현 작업의 가상과 실제의 그 모호한 경계를 탐구하는 실천이 마치 김기덕의 영화처럼 완벽한 연출력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환영이나 환상의 영역 이를테면 초현실적인 세계를 지향하듯 작가적 내면의 울림을 물질성을 지닌 작품을 통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그만의 심리적 무의식의 세계를 발현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에서이다.

그는 한 전시도록에서 아침에 눈을 뜰때, ‘나는 안전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공격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쓸수록 해답에서 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언제나 그렇듯 답은 없고 질문만 쌓여간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문구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정상현_펼쳐진 회색 방_디지털 인화, LCD, 하드플레이어_58×320×9cm_2008>
 
Seeing, Framing : 공간연출가 정상현

2000년을 코앞에 둔 1999년 천재영화감독 워쇼스키형제가 <매트릭스>라는 문제적 영화를 세상에 선보였다. 주인공 키아누 리부스(네오)가 실재라고 믿던 세상 매트릭스가 가상실제’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임을 알게 되고 인류의 구원자가 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의 세상에 대항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당시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에 영향력을 미친 <매트릭스>는 요컨대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전지구적 인간존재의 불안함을 표현한 영화로 요약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실재인가? 라며 데카르트처럼 세상을 의심하게 하는 단초를 만들기도 했고, 더 나아가 플라톤의 동굴의 일화처럼, 동굴안(매트릭스)에 사는 인간들은 그 안의 세계만을 실재라고 생각하며 동굴밖을 나오지 않는 이데아론을 떠올리게도 했다. ‘가상과 실재라는 주제를 가장 극명하게 재현한 시각예술작품이 어디있을까 싶다.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가끔 이게 꿈인지 실재인지 모르겠다며 회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장자의 호접지몽이다.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손에 들고 어느 약을 선택할 것이냐고 묻는 모피어스는 실재 세상을 보길 원하는 것은 구원자인 네오의 선택임을 지적한다. 이는 요컨대, 매트릭스안에 사는 사람들처럼 가상의 세계를 실재라 믿으며 그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한번쯤 나에게 익숙한 내가 아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물음, 혹은 의심을 통해 인간 존재의 삶을 고찰해 봄은 어떨지 관객에게 권유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의심은 우리의 시각, ‘보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 고찰의 단계는 우리의 인식의 체계를 바꾸어놓는다.

영상과 설치로 구성된 정상현의 작업은 바로 보는 것의 교란을 통해 인식의 체계를 즉 세상을 보는 방식, 태도, 관념을 고찰하게 한다. 나는 그가 기술한 언제부터인가 공격을 받는다는 불안한 심리가 그의 작품에서 작은 방(혹은 밀실)으로 묘사됨을 본다. 일견 벽에 걸린 작품이 정적이라 생각하는 순간 배경의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관객의 시선은 방해를 받는다. 이 움직이는 이미지는 방안(극장, 작업실 혹은 실내)의 창문틀안에 존재하며 방안을 넘어 바깥세상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무빙이미지에 눈을 돌리는 순간 이를 둘러싼 미니어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시선의 교란의 효과는 어쩐지 불편함을 야기한다. 원근법에 맞춰 마치 액자틀처럼 꽉짜여진 방안 미니어처는 무대세트화되있다. 그리고 정지된 방안과는 달리 벽에 난 창문은 동적인 영상을 통해 사람의 눈처럼 바깥세상을 보게 한다. 창문밖으로는 사계절 혹은 거리를 달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차들의 행렬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의 작품의 대다수는 무빙 이미지만을 싱글채널로 프로젝션하기보다는 미니어처 세트로 실내를 만들고 그 중심에 창문역할을 하는 공간안에 움직이는 이미지를 끼워넣어 벽에 거는 회화역할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반복된 대칭, 유사한 이미지들의 조합, 창문앞에 놓인 격자틀, 그의 예술적 장치들은 이 때문일까 일견 답답한 공간적 구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을 쉴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면 어떨까. 작가는 왜 공간을 막아놓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외부로 팽창하지 않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밀실에 갇히고 만 것이다.

<동전의 양면>이라는 주제의 이번 전시에 소개된 <데칼코마니>연작은 2006년 시작된 달력그림을 이용해 사계절을 묘사한 전작 <창밖을 보았을 때> <무책임한 계절> <빈계절>과 괘를 같이 한다. 소위 이발소 달력그림으로 일컬어지는 사계절이 묘사된 키치적 소재를 무빙이미지로 방안창문에 재현한 것이다. 그는 늘상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이미지들을 무빙이미지로 재현한다. 그의 미니어처 공간연출법은 그가 클레이애니메이션을 작업했던 1년여의 과정속에서 아이디어로 등장한 것이다. 조소를 전공한 그는 정지된 이미지를 프레임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일련의 노동집약적인 애니메이션작업과정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역학을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 동기화한 것이다. <데칼코마니>연작을 보자. 배경의 이미지는 일반적인 달력그림을 사진으로 찍고 전경에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해 꽃, 나무, 눈을 만든다. 즉 클레이애니메이션의 수공예적인 노동의 과정을 거친 작업이 무빙 이미지로 탄생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화의 문제인데, 창백해보이리만큼 저채도의 실내분위기와 달리, 창문 넘어 영상은 총천연색으로 활기가 넘치는, 생명력넘치는 세계로 비쳐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딘지모르게 촌스러워보이는 구성법이다. 실상 이러한 그의 공간연출력은 시선을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역설을 만든다. 즉 방안을 보는 우리는 이내 무빙이미지로 시선을 돌리고 무빙이미지에 시선은 고정된다. 인간의 이선은 정지이미지보다 무빙이미지에 고정되는 법이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시각적 교란일까.

 

                                                               <정상현_무책임한 계절_단채널 비디오_00:03:01_2008>


Breathing
숨쉬기

앞서 언급한 김기덕감독의 영화중에 2007년 제작된 <>이라는 영화가 있다. 남편의 외도로 허탈함을 느끼던 한 여자가 뉴스에서 본 한 사형수에게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형만을 기다리던 남자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날 찾아온 이 여인은 그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 무채색의 감옥안에 총천연색의 벽지를 붙이는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촌스러운 달력그림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그들은 춤을 추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에게 키스를 하더니 그의 입을 막아버린다. 순간 공포를 느낀 남자는 그녀를 밀쳐버린다. 여자는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숨이 막힐뻔한 기억을 그와 공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살을 시도하고 숨을 스스로 끊으려 한 사형수이지만, 그녀가 가한 순간적 숨막힘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에게 강한 생명에 대한 갈구함을 호소한 것이다.

이 무채색의 감옥, 흔히 밀실로 표현되는 이 폐쇄의 공간에 표현된 총천연색의 달력그림처럼, 정상현의 공간연출법은 우연이지만 김기덕을 닮았다. 그리고 숨막히는 이 밀실의 공포는 작가가 늘 연출하는 밀실의 방안이 가상과 실제라는 시공간적 지각의 문제를 고찰하기 보다는 보다 더 근원적인 작가 혹은 인간의 자기존재감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을 공간화한 것이 아닐까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공격을 받는다고 표현한 문구는 마치 새벽녘의 도둑처럼 미니어쳐 천장을 뚫는 2006년 작 <새벽의 침입자>에 더 강력하게 재현된다. 어쩌면 일견 답답해 보이는 공간 구성은 <>의 사형수처럼, 또 다른 생명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강한 갈망과 맞닿아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숨막히는 듯한 공간연출력은 싱글채널작업에서 변화를 보인다. 온전히 영상만을 보여주는, 실은 사진과 영상이 합성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합성작품이라 할, <냉온> , <발화지점>, <야만과 문명>은 싱글채널 신작으로 <야만과 문명>은 익숙한 방안실내에 느닷없이 건물과 다양한 돌덩이가 180도 회전하며, 정지된 채 고정된 배경이미지와는 반대로 움직이는 이미지가 전경에 위치한다. 화려한 서구식 벽돌건물들이 다양한 암석덩어리들로 교차하며 움직인다. <데칼코마니> 연작에서 후경에 보이던 무빙이미지는 이제 전경으로 이동한다. <발화지점>의 경우도 유사한 방식이다. 숲속에서 집 한 채가 불이 타는 광경이 전경에 펼쳐진다. 배경의 숲속은 사진으로 정지되있고 전경에서 불의 형상과 타기전의 집이 교차하며 회전한다.

<냉온>은 이들 싱글채널 중 그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동이 트는 거대한 바다를 배경으로 빙하와 같은 얼음덩어리가 물로 변하기도 하고 돌로 변하기도 하는 움직이는 형상을 재현한 것이다. 고체와 액체의 그 이중적 측면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배경의 이미지는 사진작업으로 정지되 있다. 재미있는 것은 회전할 때 들리는 기계음소리가 그 효과음으로 제작된 점이다. 사운드효과를 이 기계음이 대신하는 것이다. 물론 <데칼코마니>연작은 소리가 없다.

                                       <정상현_무책임한 계절_단채널 비디오_00;02:59_2008>

<냉온> <발화지점> <야만과 문명>은 독일 르네상스시기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을 연상시킨다. 소위 왜상(anamorphosis)이라 불리는 이 그림은 두 대사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하는 순간 전경하단에 사선으로 그려진 해골그림을 맞닦드리는 그 섬뜩함, 혹은 낯설음과 유사하다. 라캉은 이 해골 그림을 가리켜 우리의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보이지않는 응시(regard)'의 일종이라 했다. 로마 카톨릭을 반대하려는 영국을 찾아간 막중한 임무를 띤 프랑스의 대사들의 고요해보이지만, 어려운 현실에 맞닦드린 두 인물의 내면의 불안함이 해골을 통해 묘사된 것이다. 해골의 그림을 금새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늘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그것이 매복하여 언제고 뛰쳐나와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복하고 있는 눈초리와 같은 것이 응시개념이다.

이는 이질적인 공간의 흐름, 내가 여기서 촌스럽다고 표현한 그것, 가상과 실재의 공간을 재현한 정상현의 작업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즉 보는 것의 의미를 넘어 불안한 인간심리의 반영이 밀실의 공간으로 발현된 것이다. 전후 독일국민의 인간존재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한 표현주의영화 <칼리가리박사의 밀실>의 제목처럼, 밀실로 번역된 영어의 ‘cabinet’은 정상현의 작업에도 반영된다. 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까지도 파악하길 바라는 작가의 내면의 울림이 이제 공격을 받고 있다라는 두려움, 매복한 눈초리(라캉의 응시)를 넘어서면 어떨까... 인간은 누구나 불안함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불안도 라캉이 말하는, 우리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눈초리, 응시의 일종이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빠져 나와 그 그림자가 비쳐진 빛줄기를 만난 후의 작업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IAN Art 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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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YEBALL_Media Arts Web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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