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드라마로서의 현대미술 :: 함양아의 형용사적 삶
에필로그
에필로그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시편 138: 18)
현대미술은 참으로 불친절하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소위 60년대 이후 개념 미술 (conceptual art)의 등장은 작가, 평론가에게는 일견 재현과 해석의 재미를 안겨다주었지만, 가장 객관적인 수용자라 할 관객, 특히 미적 판단이나 감상교육을 받지 못한 미술관 갤러리를 자주 찾지 않는 일반 관람객들이 작품을 대할 경우, 작품이해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모든 이를 만족시켜야 예술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건 분명 아니다. 그러나 벤야민이 전통적인 아우라의 파괴를 몰고 온 19세기의 뉴테크놀로지였던 ‘영화’의 시각적 충격을 논하던 시대, 그 전통적 아우라를 생산한 실체, 유일무이한 작품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초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인스턴트 라면보다도 짧은 3초의 시간만으로도 우리는 쉽게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미술관, 갤러리의 작품들은 어떠한가, 전시장을 들어서면 미디어작품들의 등장으로 혼잡한 사운드는 물론이고 다양한 영상의 시각적 폭격은 물론이거니와 마치 풍물시장과도 같이 일상적 오브제들이 널부러져 있는 가 하면 화이트큐브의 벽면을 넘어 바닥 천정 할 것 없이 무차별 시선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지경이다. 관객은 전시관람을 위해 동선을 조절해야하며 시간과 인내를 문화적 혜택과 교환해야 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사고의 과정을 요하기까지 하는 개념미술은 한마디로 피곤하기까지 할 것이다. 아우라의 파괴를 벤야민이 즐거워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벤야민이 지적한 아우라의 파괴 그것은 오늘날 소외된 자들도 예술을 향유하게 하는 것, 즉 정치권력 분배의 재구성 그것이었다.
벤야민은 21세기 관객중심, 소비자중심주의 사회를 예견한 놀라운 직관력을 지닌 미학자로서 대중이 문화소비자로 부상한 21세기, 한국 사회에는 너무도 필요한 이론가가 아닐 수 없다. 벤야민이 근대화된 파리도시를 산보하며 확장된 감각예술을 몸소 익힌 바 처럼 21세기 한국의 예술과 문화는 우리의 동네골목을 돌아돌아 전통시장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유난히도 예술교육에 몰입중인 현재진행형의 한국은 예술교육에 방점을 찍은 세계 유네스코대회를 앞두고 있다. 이러한 배경은 궁극적으로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논하는 전시로 요약될 수 있는 함양아의 형용사적 삶이라는 테마전시와 무관하지 않음을 본다.
형용사적 삶 v.s 형용사, 친절하지 않은
함양아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이지만, 요약컨데 비디오영상에 주목하는 작가다. 한국과 암스테르담을 오가며 작업하는 유목민적 기질은 ‘여행’이라는 필연적 조건을 만든다. 2004년 개인전 Dream in ..Life이후 2005년 Transit Life, 그리고 2010년 형용사적 삶에 이르기까지 ‘삶’의 시리즈는 서울을 떠나 경계인으로 살아온 작가가 이 사회와 관계맺기과정을 재현한 한편의 시적 다큐멘터리의 기능을 다한다. 서울, 뉴욕, 시카고, 중국, 네덜란드, 등 함양아의 작업모티브의 공간은 가히 글로컬적이다. 사회속에 존재하는 개체로서의 인간과 그 인간이 맞닥드리는 현실과의 관계를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고찰하는 그녀의 작업태도는 실존주의적 태도로 요약된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 혹은 세상, 타자에 대한 시선, 그리고 이 사회에 순응하는 훈육된 비둘기의 시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용사적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다.
함양아의 이번 전시는 2006년 이후 작품을 모은 회고전 형식의 개인전으로 그만큼 내용과 형식에 충실하려한 노력을 읽어내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에게 시간과 관찰을 요구하게 한다. 그러나 관람객에게 세심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의 의미는 어느 정도의 인내심을 요한다는 뜻이자 역으로 말하면 작품을 쉽게 이해할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유리벽면을 메우고 있는 작가가 쓴 소설형식의 <넌센스펙토리(2010)>라는 글이 제일먼저 관객을 맞는다. 물론 나는 벽면만 쳐다봤을뿐 준비된 국문텍스트를 읽었다. 고백하자면, 집에 와서야 마저 텍스트를 읽었다. 소설에 관심을 둔 작가는 시각이미지가 아닌 인쇄문자, 텍스트를 전시공간에 유인물처럼 비치하고 배포한다. 여기에서 첫번째 ‘친절하지 않은’ 현대미술의 한 사례를 본다. 난 이 전시리뷰를 위해 두번의 방문과정을 거쳤다. 작품이해에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역으로 이는 회고전에 대한 작가적 열정이 2층 전시공간 전체를 분리된 가림막도 없이 마치 벼룩시장에 물건을 쏟아놓은 것처럼 배치한 기획자의 전시설치의 불친절함을 야기한 계기를 제공한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전시스펙터클의 과잉이라 말할 수 있다.
전시공간의 순서상 넌센스펙토리라는 주제하에 두번째 작품과 세번째 작품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가림막도 없이 공간을 할애한 것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설치방식이다. 벽면에 붙은 작품설명을 찾느라 도슨트에게도 물었지만,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자신은 도슨트가 아니라했다. 세번째 작품의 설명서를 두번째 작품뒤 벽면에서 찾았으니 말이다. 물론 종이안내서가 있다. 하지만, 공간의 이해를 위해서 벽면에 작품순서를 적고 제목과 함께 설명을 해놓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는 여타 현대미술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로를 찾는 과정처럼 작품설명서를 찾고 나서야 다음 작품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오프닝날 작가는 미술계 인사분에게 작품설명을 하고 있었다. 어른에 대한 예우일수도 있겠으나, 일반 관객에게 설명이 필요하면 작가는 어떻게 할까? 또다른 불친절함은 청각적 측면이었다. 사운드의 과잉(excess). 남자의 화내는 소리, 말소리 등은 대칭을 이루는 <아웃 오브 프레임 (2010)>이라는 영상작품의 사운드와 교차되어 혼란을 가져왔다. 초콜릿두상을 가운데 두고 젊은 무리들이 유희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작품속 사운드와 교차되어 작품감상을 방해하기 충분했다. 이는 대개의 미디어아트 영상작품이 독립된 부스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의 사례와 유사하다. 첨언하자면 <새의 시선>이라는 영상작품은 1층에 3채널로 공중에 설치되있지만 대체, 작품제목은 적혀있지 않다. 오로지 종이안내서에 의지하기에도 이 작품은 관람과정이 쉽지 않다. ‘친절한’이라는 형용사에 방점이 찍히는 이유다..
멜로드라마, Art v.s Society
함양아의 작품이 관통하는 중심테마는 ‘삶’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유목적 삶에서 기인한다. 정주하지않고 유목의 삶을 살다간 백남준처럼, 신자유쥬의시대 대다수의 작가들은 여행을 하는 이방인의 삶을 살아간다. 함양아 역시 끊임없는 타자, 사회와의 관계맺기를 통해 개인의 존재론에 정체성을 덧입힌다. 신진작가들이 늘상 그렇듯 자신을 정립하는 작업이라 요약될 수 있는 사적 내러티브 혹은 기억들을 재현하는 초기작업에 이어 함양아 역시, 사회, 공적 기억의 문제들을 담아내곤 한다. 개인적이건 공적 삶이건, 그 무엇인가로 고정될 수 없고 정의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삶이 존재하며 이러한 삶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과도 같다. 50-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멜로드라마를 분석한 영화이론가 제프리 노웰 스미스는 저서 <Home is Where the Heart is> 에서 “사회속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내고 재현하는 것이 멜로드라마이며 멜로드라마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것들을 재현하는 쟝르로서 규정”된다고 보았다. 함양아의 작품 역시 멜로드라마의 재현법을 따른다. 이를테면, <Collected Anonymous(2007)>은 네덜란드의 한 도시를 여행하며 걷다가 주운 쓸모없을 상당수의 여성용 머리끈을 한국으로 가져와 DNA분석을 한 후 그 혹은 그녀의 삶을, 쓸모없을 시도로 보이는 추적불가능한 삶을 추측 혹은 상상해보려는, 다양한 삶의 단층을 재현하려는 소설과 같은 몽상적 사유를 개입시키곤 한다. 그녀의 몽상적 사유는, 특히 영상작업에서 두드러진다. 2006년작 <Portable Life>, <Ultimate Travler’s Guide>등에서 로드 무비처럼, 고정되지 않고 화면이 흔들리게 하는 영상기법이나 슬로우모션을 차용하는 형식적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뷔뉘엘과 달리의 초현실주의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처럼 현실을 초-현실하려는 의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하려는 의도는 주로 내레이션, 혹은 대사를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유사-SF영화 <Invisible Clothes(2008)>는 이미지보다 텍스트(대사)가 압도되어 이미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즉 대사를 유심히 들어야 작품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이는 역으로 시각 이미지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여러 작품에서 특히 다수의 영상작품에서, 소설 텍스트와 설치가 가미된 신작 <넌센스팩토리>사례처럼, 이미지보다 텍스트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읽는다. 18세기 새로운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비극의 한 변형이 멜로드라마라고 본 제프리 노웰 스미스와 “멜로드라마가 비극과 유사하긴 하나, 영웅과 악인사이, 개인의 선과 악의 윤리적 대립을 보인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견해처럼, 우리의 삶은 수많은 결정과 개인내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대립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어린시절 보았던 TV애니메이션 “톰과 제리”의 쫒고 좋기는 순환적 관계처럼, 내가 무언가를 쫒는다고 생각한 그 순간 내가 오히려 쫓기는 자가 되는 상황들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며 살아간다. 예술과 사회, 정치와 권력 분배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인 <초콜릿 두상(2007)>, <아웃 오브 프레임(2007)>는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를 연상케한다. 세계의 유명 콜렉터, 큐레이터의 두상을 초콜릿으로 제작하고 초콜릿이라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먹어버리고 마는 퍼포먼스처럼, 아티스트와 큐레이터 콜렉터의 관계는 현대미술계의 끊임없는 먹이사슬의 과정처럼 필연적인 화두로 존재한다. 우리의 삶이 “관계맺기”, 즉 좋은 관계맺기에 있는 것이라면, 이는 아티스트에게도 필수조건이 된 시대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13개의 작품 중 절반 가까이 ‘초콜릿’이라는 재료를 사용했다. <아웃 오브 프레임>의 국내판 신작대신 감히 나는 제안해본다. 홍라희씨를 비롯한 국내 유명 인사들을 초콜릿두상으로 제작하고 전작처럼 퍼포머들이 빨아먹게 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다면 관객의 반응은 어떨까? 작가는 이번 전시에 소형이지만 초콜릿으로 자신의 전신을 제작했다.
에필로그에서 나는 성경 한 구절을 인용했다. 모래를 누가 세려고 할까 세고 싶어도 세어지지 않는 삶,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함양아의 형용사적 삶, 곧 ‘우리의 삶’은 나의 의도로 셀 수 없는 무수한 모래알들로 화석처럼 겹겹이 쌓여있을 뿐이다.
(본 글은 서울문화재단의 '예술평론활성화지원사업'을 통해 선정, 지원하는 평론가가 '2010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 선정 작품을 대상으로 작성한 현장평론을 재게재한 것입니다.)
IAN Art Critic



